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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그녀 품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

by eunic 2007. 7. 3.

그녀 품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

<내 책상 위의 천사>

김혜리 / 씨네21 기자

2007. 04. 06.

여성 감독만이 진정한 여성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위험하다. 그러나 여성의 생을 영화로 그리는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특정한 방향을 골라 멀리 멀리 가다보면 여성 감독만이 가꿀 수 있는 비밀의 꽃밭이 존재한다, 고 생각한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내 책상 위의 천사>를 본 날, 나는 처음 거울을 정면으로 본 갓난애와 같은 고요한 경이감을 느꼈다. <내 책상 위의 천사>는 뉴질랜드 작가 재닛 프레임의 반생을 옮긴 영화다. 콤플렉스와 대인 공포증에 시달리며 성장한 재닛은 오진으로 정신병원에서 고통 받다가 문학적 재능에 의해 구원받는다.

<내 책상 위의 천사>는 원작자 재닛 프레임에겐 자서전이지만, 감독 제인 캠피온의 입장에서는 그냥 전기다. 그럼에도 캠피온은 영화적 감정 이입을 통해 '자서전'의 문체를 보존한다. 우리는 재닛을 그저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녀의 피부 밑으로 기어들어가 세상을 내다본다. <내 책상 위의 천사>는 여성 특유의 촉각적 기억을 이해한다. 재닛의 유년은 자매들과 함께 덮은 이불과 맨발에 닿은 흙의 감촉이다. 아버지를 여읜 그녀가 애도하는 방법은, 아버지의 낡은 구두를 조용히 신어보는 것이다.

캠피온은 비밀이야말로 여성의 권력임을 안다. 한 명의 새 친구가 새로운 하나의 우주를 의미하는 소녀시절의 환희를 안다. 모든 여자아이는 공주다. 임금님이 밤마다 자물쇠를 잠가도 아침이면 밤새 춤춘 듯 구두굽이 닳아있었다는 열 두 명의 공주에 대한 동화를, 재닛은 사랑한다. 공주들은 밤새 어디에 다녀왔을까? 그 비밀을 깨달았을 때 재닛은 진짜 공주가 된다. 그녀에게 '춤'은 글쓰기다. 작가가 된 재닛은 한밤중 마당에 나와 간간히 스텝을 밟으며 한 줄 또 한 줄 써내려간다.

내 경험에 따르면, 여자에게 자아의 확립은 안온히 머물 수 있는 자신의 장소를 찾는 일과 같다. 가난, 자매의 죽음, 자살 기도 등 수난이 번갈아 닥치는 재닛에게 그 일은 지난해 보인다. 하지만 캠피온 감독은 기묘하게 관객을 안심시킨다. 아기 재닛이 걸음마를 할 때는 엄마의 벌린 팔이 울타리를 만들고 칠판 앞에서 벌 서는 꼬마 재닛은 햇살의 애무를 받는다. 최악의 순간에도 캠피온의 구도는 재닛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창조한다. <내 책상 위의 천사>는 보살피는 영화다. 이 글을 위해 <내 책상 위의 천사>를 오랜만에 보았다. 재회한 천사는, 다시 나를 안아주었다. 그녀 품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