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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김예슬 선언

by eunic 2010. 12. 27.

김예슬 자퇴 선언은 노이즈 마케팅?

시사INLive |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 입력 2010.04.30 11:12

3월10일 이 땅에서 대학생이 한 명 줄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김예슬씨(25). 그녀는 학교 교정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의 학생 신분을 스스로 버렸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누구라도 빠져나올 엄두를 못 내는 최악의 학벌사회에서 대학생, 그것도 명문대생이 자기 기득권을 포기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어떤 이는 전태일의 분신에 이를 비유하기도 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김예슬 선언' 카페(http://cafe.daum.net/kimyeseuls)에는 3000명 넘는 회원이 가입했다.

'그런데' 모두가 김예슬씨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았다. 가리키는 손가락에 흠집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이들의 냉소에는 자퇴 선언 이후 김씨의 행보와 무관치 않다. 김씨는 자퇴 선언 직후 "나 개인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부담스럽다"라며 언론 인터뷰를 사양했다. 그리고 한 달 남짓 뒤 그녀는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라는 책 한 권을 들고 나타났다. 125쪽 분량의, 마치 시집처럼 얇은 책을 통해 그는 대자보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몇몇 언론의 인터뷰에 뒤늦게 응했다.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책을 팔아먹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이라거나, 누군가 그녀를 배후조종하고 미리 모든 걸 준비한 '쇼'라는 힐난이었다.

김예슬씨(위)는 자기 책 말미에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눈 내린 날 행한 나의 대학 거부 선언은 시든 꽃처럼 잊힐 것이다"라고 썼지만, 자신의 짐작과 달리 김예슬이 던진 돌멩이는 우리 사회에 그치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 시사IN > 과 김예슬의 인터뷰는 이런 세간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김예슬씨는 자기 책 말미에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눈 내린 날 행한 나의 대학 거부 선언은 시든 꽃처럼 잊힐 것이다'라고 썼지만, 자신의 짐작과 달리 김예슬이 던진 돌멩이는 우리 사회에 그치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자퇴 선언 후 40일이 지난 4월20일, 진달래 피는 서울 독립문공원에서 그녀를 만났다. 몇몇 질문은 트위터를 이용하는 20대로부터 받았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반응을 접하면서 많이 배우고 경청했다. 비판도 응원도 고맙기만 했다"라며 입을 열었다.

책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자퇴 선언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반응을 보면서 대자보로는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주변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들과 함께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책이 한 달 만에 나온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다.

내 책상에 노트가 30권 정도 있다. 대학 입학 후 마주친 의문에 대해 그때그때 적어나간 것이다. 이 노트를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책이 한 달 만에 나왔든 하루 만에 나왔든, 그 내용에 더 주목해줬으면 한다.

대자보를 통해 자퇴를 선언한 것은 다른 이들과 '소통'을 하려는 것 아니었나. 그동안 왜 언론과 접촉을 피했나.

나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보다는 대자보의 메시지에 집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때는 이미 수많은 이가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어서 내가 덧붙일 게 없었다. 다시 인터뷰에 나서게 된 건 책을 썼기 때문이다. 책은 만날 수 있는 이들이 한정돼 있으므로 언론을 통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행보를 두고 '쇼'라는 비판도 있다.

그런 의문을 가질 법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내가 더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설명될 리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말이 아니라, 내가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보여드리겠다는 것 외에 더 드릴 말씀이 없다.

지금 대학을 '자격증 장사 브로커' '배움도 물음도 없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구체적으로 자퇴를 선언한 계기가 뭐였나.

2006년에 시민단체 나눔문화를 친구 소개로 찾아갔다가 박노해 시인과 대화하면서 '그만 배우고 생각하기' '그만 생각하고 행동하기, 지금 바로 살아가기'라는 화두를 접했다. 2004년 입학 후 경쟁과 취업에 매몰된 대학을 보면서 계속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다. 그 이후 실제 '그만 배우기, 살아가기'를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4년이 걸린 셈이다.

< 시사IN > 과 김예슬 사이에는 작은 인연이 있다. 2007년 여름 < 시사IN > 창간을 앞둔 < 시사저널 > 기자들이 서울 아현동 심상기 < 시사저널 > 회장 자택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 나눔문화 회원들이 지지 방문을 온 적이 있다. 그중에 대학생 김예슬씨가 있었다. 그들은 '아빠, 힘내세요'를 개사한 '기자들,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불러 파업 중인 기자들에게 힘을 보탰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번 선언이 있기 전부터 이미 나눔문화 회원으로서 사회적 발언과 실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퇴 결정에 대해 나눔문화 사람들과 상의했는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인간 김예슬의 일생을 건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책에서 진보 언론과 진보 인사들에 대해 좀 더 '래디컬'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그분들은 대학이 문제라면 (자퇴할 것이 아니라) 등록금 인하나 무상교육을 요구하라고 말한다. 등록금 인하 투쟁은 분명 필요하지만,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등록금 투쟁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 시간에 스펙을 쌓아서 어서 빨리 취업해야겠다는 식으로 접근하게 될 수도 있다. 과거 선배들은 민주주의·인권 가지고 싸웠으면서 우리에게는 그런 경제적 싸움을 하라는 게 역설적이었다. 그들이 우리 세대에게 그런 경제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눔문화 제공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년 김예슬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치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한쪽에서는 이념의 과잉이라고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우리에게는 삶의 가치가 사라지고 이익만 남았다. 요즘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나라를 모델로 삼지만, 모든 인류가 다 그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서 '국민소득 3만 달러' '국가경쟁력' 같은 말을 외치며 살게 된다. 그 결과 경제만 살리겠다는 이명박 대통령 쪽으로 미끄러지게 된 것 아닌가.

그런 일은 체제 내, 대학 안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토익 공부하면서 그런 가치를 나누는 활동을 할 수 있지 않나.

지금은 저항과 탈주 둘 다 필요하다. 저항하는 한편으로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와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내게는 토익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삶을 모색하라는 건 심장을 두 개로 나누어 살라는 말과 같다. 나더러 극단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자퇴하면서 최소한의 저항밖에 하지 않았다. 분신자살이나 총기난사를 한 것도 아니다. 정말 극단적인 건 대학을 위해 12년 동안 매달려야 하는 이 시스템이다. 여기서 나부터라도 빠져나오자고 결심했다.

지금 시대에 대해 '대학-시장-국가'가 합쳐 '억압의 3각 동맹'을 이룬다고 했는데, 어렴풋하게나마 바라는 사회의 상이 있나. 이를테면 복지국가나 사회민주주의 체제 같은.

국가가 마련하는 복지가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국가의 돈에 기댈수록 실제 개인 삶의 자율성은 작아진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자가 되어가면서 스스로 뭔가 하는 능력은 퇴화한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배움은 학교에서, 의료는 병원에서, 종교조차도 어떤 제도화된 곳에 맡기고···. 아직 뚜렷한 답은 없지만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재능이나 관심사를 가지고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받으며 살 수 있는 자급자족 공동체가 먼저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건 작은 마을일 수도 있고, 농촌공동체일 수도 있다.

기존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기자의 시각에 김예슬씨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지금 사회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울림이 있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다소 공허한 대답이 되돌아오고는 했다. 일부에서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를 두고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냉소하는 데에는 그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막 실존의 몸부림을 친 청년에게 어떤 해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할 수도 있겠다.

고대생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학 자퇴 선언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일면 맞다. 뿌리 깊은 학벌 시스템의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내 행위가 똑같은 학벌주의의 눈으로 수렴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내게 고대라는 사회적 자본은 사라졌다. 내게 진짜 사회적 자본은 그런 고민을 나눌 친구들이 있다는 것뿐이다. 한편으로 내 선언이 대학 문턱을 밟지 못한 분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싶다.

뜻밖에 20대 일부가 당신을 냉소하더라. 당신이 앞으로 사회운동을 하는 데 이번 자퇴 선언이 또 다른 '스펙'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봤다.

우리 세대가 386 정치인들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자퇴 선언이) 사회적 스펙이 될 거 같으면 한 번 열심히 해보라고도 하더라(웃음). 그러나 저항하는 내 삶을 다시 이용해서 나 개인의 성공을 위해 쓰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점을 앞으로 내 삶으로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김예슬씨는 직업이 꿈이 되는 세상이 불행하다고 했다. 대학을 거부한 그의 꿈은 뜻밖에 '대학'을 하나 세우는 것이다. 입학시험도 졸업장도 없는 대학, 발목이 시리도록 대지를 걸으면서 묵직한 고전을 읽고 신문뉴스를 분석해 그것을 삶에 적용해나갈 수 있는, 자신의 잠재된 재능을 찾아 사회에 꼭 필요한 창업을 하고 경영하는 법을 익히는 '세상에 없던' 대학···. 얼핏 보면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에나 나올 법한 꿈을 이 20대 청년은 간직하고 산다. 그녀를 둘러싼 사회 안팎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넘어,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 그는 자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김예슬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다.

인터뷰 장소는 두 번 바뀌었다. 애초 기자는 '잔인하게도' 고려대에서 만나 인터뷰하자고 요청했다. 김예슬씨에게는 20대 청춘의 한 자락이 담긴 곳이자 대학 거부를 선언한 그곳, 고려대 교정에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꽤 상징적이리라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내 '안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상식적 답변이 돌아왔다. 김예슬씨는 자퇴 선언 이후 지금껏 한 번도 고려대에 가지 않았단다.

두 번째 장소는 나눔문화 사무실이었는데, 인터뷰 당일에 행사가 열리는 바람에 결국 인터뷰 장소를 < 시사IN > 사무실 부근 독립문공원으로 잡았다. 공교롭게도 자퇴 선언을 한 김씨와의 인터뷰는 공원 내 '독립선언' 기념탑 옆에서 진행됐다. 그녀는 "고려대보다 여기가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꽃과 나무도 많고, 지금 고려대 교정 곳곳에는 기업의 이름을 단 건물만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직접 본 김예슬씨는 인상이 밝고, 차분했다. 웃을 때 '호호' 웃지 않고 '하하' 웃었다. 3월10일 굳은 표정으로 피켓을 들고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죽은' 대학을 고발하던 김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신의 자퇴 선언조차 결국 '사회적 스펙'이 되는 것 아니냐"라는 예민한 질문에도 그녀는 차분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뭘 하면서 놀 때 가장 즐거운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화하면서 노는 게 즐겁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다른 젊은이처럼 인터넷에 글 쓰는 것도 즐기지만, 평소에 손글씨 쓰는 걸 즐긴다고 했다. "몸이 기억하는 글쓰기 행위는 뭔가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퇴 선언 대자보도 손으로 꾹꾹 눌러쓴 것이었다.

영화든 연극이든 최근에 본 예술작품 중 기억에 남은 것 하나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김씨는 "매화꽃·복사꽃·진달래·개나리·할미꽃 그리고 이름 모를 풀꽃들이 제자리에서, 저마다의 속도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봄날의 땅을 바라본 게 마음에 남았다"라고 말했다. 책으로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을 담은 책 < 누구 없는가 > 를 꼽았다.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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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자퇴대자보 전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한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