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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을 센다

옥살이뒤 닥친 병마…“제 가족에 빛을 주소서”

by eunic 2011. 7. 20.

옥살이뒤 닥친 병마…“제 가족에 빛을 주소서”

[한겨레] 임지선 기자

등록 : 20110620 20:32 | 수정 : 20110621 10:09

[바보의나눔-한겨레 공동캠페인] 근로빈곤층과 희망나누기



»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만에 모범수로 출소한 이아무개씨가 17일 오전 자신의 집에서 아이의 성장앨범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와 성장기를 같이 보내지 못한 탓에 아버지 사진란이 비어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살인 전과자 이씨의 기도

‘첩’ 어머니 구박한 친척 살해…감옥서 19년 아내가 뒷바라지

출소뒤 새 삶은 전과자 낙인에 고된 생활속 아내는 위암 말기


살인자의 아내(50)는 지난 19년 동안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남편이 이대로 죽지 않기를, 결국 무기징역형을 살게 된 남편이 언젠가는 풀려나기를, 만일 풀려난다면 두 딸과 함께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오래 기도했다. “우리 걱정하지 말고 건강 챙기세요. 하늘이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줄 거예요.” 아내의 편지는 19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남편이 있는 교도소로 배달됐다.


기적처럼 남편은 지난해 3·1절 특사로 풀려나 19년 만에 가족에게 돌아왔다.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고 기뻐했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남편을 기다려온 아내는 남편이 출소한 지 6개월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암은 간으로까지 전이돼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이제 남편의 기도가 시작됐다.


남편 이진철(가명·50)씨는 경북 경산에서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씨의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3남2녀를 낳고도 늘 시댁 식구들의 구박을 받았다. 어린 이씨의 마음에는 어머니를 구박하는 친척들을 향한 분노가 쌓여갔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방황하던 이씨는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하며 새 삶을 시작했다. 제대 뒤 서울에서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딸 둘을 낳았다. 사랑은 분노를 잠재운 듯했다.


하지만 이씨는 결국 1991년 12월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경산 노부부 살인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어머니 흉을 본다는 이유로 친척 아저씨 부부를 사과 깎던 칼로 찔렀다. 사건 보름 뒤 범행을 자백하며 이씨는 “여섯살, 세살인 두 딸에게 이번 크리스마스 때 케이크를 사다가 파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마지막으로 그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고 경찰에 부탁했다. 그해 겨울 경산경찰서에서 두 딸을 앉혀놓고 파티를 열어주었다. 이후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아내는 억척스럽게 가정을 지켰다. 파출부, 우유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3~4시간밖에 되지 않는데도 일주일에 한 번씩 교도소로 면회를 왔다.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 미술에 소질이 있는 큰딸의 그림을 초등학교 때부터 앨범에 모아두었다. 둘째딸이 받아온 상장과 성적표를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도 악착같이 ‘모범수’가 됐다. 자동차정비 산업기사, 이용 기능사 등 7개의 자격증을 따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됐다. 2000년에는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필기구 반입이 금지됐던 교도소 안에서 나무판에 나무 막대기로 글씨를 쓰며 공부했다. 아내를 생각하며 이씨도 3~4시간만 잠을 잤다. 2003년 광복절에 법무부장관이 이씨의 무기징역형을 20년형으로 감형했다.


지난해 3월 꿈을 안고 출소했지만 전과자에게 세상은 냉담했다. 버스회사만 9곳을 찾아갔지만 모두 그를 고용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당신 건강보험 기록을 보면 지난 19년 동안 교도소에 있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며 “전과자라서 고용을 꺼리는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이씨는 마지막 희망으로 출소자에게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기쁨과 희망 은행’에서 2천만원을 대출받아 자동차 광택 1인 기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가게도 없이 홀로 하는 사업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이 은행에서 자금을 빌린 사람은 100명이나 되지만, 창업을 해 제대로 자리를 잡은 사람은 25명이 채 안 된다.

아내는 파출부, 우유배달을 계속해야 했다. 미대에 진학한 큰 딸(25)은 값비싼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다. 둘째딸의 대학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어렵사리 충당했다. 이씨는 이력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했다.


정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해 9월 “소화가 잘 안 된다”며 병원을 찾은 아내에게 위암 4기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는 “많이 아팠을 텐데 암이 이렇게 퍼지도록 어떻게 견뎠느냐”고 아내에게 물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아내는 매일같이 한 줌씩 머리카락이 빠졌다. 의사는 “앞으로 4~5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 2월 드디어 취직을 했다. 마을버스 기사로 새벽 5시30분 첫차부터 다음날 새벽 1시 막차까지 운전을 한다. 격일 근무로 한 달을 일하면 세금을 떼고 150만원을 손에 쥔다. 아내의 병원비를 감당하기에도 부족한 액수다. 대학을 그만둔 큰딸도 직장을 찾는 중이다. 지금도 아내는 출근하는 남편에게 “내 걱정하지 말고 힘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씨는 기도한다. “못난 제가 아내와 아이들을 지킬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를 마치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출근을 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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