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존자 & 페미니즘

그리고 또 한걸음을 꿈꾸며

글. 땐,사자자리(indisec@dreamwiz.com) / 언니네 편집팀

생존자 & 페미니즘 내가 여성주의를 접하는 과정에서 중요했던 한 고개라면 피해자로서의 나를 만난 일이었다. 유아 성폭력 피해의 경험이 있었던 나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모님의 확신 하에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감정들만을 안고 묻고 살고 있었다.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나의 경험과 감정이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고, 여성주의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그래서 구리디 구린 존재 에서 피해자, 요즘 말로 하면 생존자라는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한 단계 한 단계 내 경험을 정리해가면서 조금씩 내가 건강해지는 느낌이었고, 나중에는 피해자였다는 것이 이후 다른 여성들의 아픔과 공감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 되리라 믿으며 살짝 기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고 그 동안 수많은 여성주의자들을 만났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경로를 통해 감당할 수 없는 구린 존재에서 당당한 생존자로 치유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험들은 너무 치명적이어서 이미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자아의 여지를 너무 많이 갉아먹은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그녀의 놀라운 용기와 훌륭한 자매들에도 불구하고 치유를 위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사실, 상처와 치유는 어느 하나로 판정할 수 없는 상태이고 내가 어느 만큼 치유되었다고 해도 어떤 부분은 어쩌면 죽는 날까지 진행되는 숙제와 같이 남기도 한다. 그 와중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고 보는 나의 기준이라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상처와 치유되는 과정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상태' 물론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내가 지금 내 상처 때문에 힘들어 하는구나.'를 알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다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 이것을 기준으로 삼느냐면, 그럴 수 있어야 스스로 치유해갈 수 있는 궤도에 올랐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존하기, 치유하기, 그리고 실력행사도 하기 잃어버린 75%의 자아를 찾는 기분으로 여성주의에 입문(^^;)하여 자매들과의 치유경험을 나누는 것 만큼 즐거웠던 것은 그간 나를 구리게 몰아세웠던 세상에 대해 '실력행사'를 하는 일이었다. ^^; 누구누구를 찾아가서 때려주고, 세상에 저주를 퍼붓는 것을 통한 복수혈전과 같은 일은 아니었고(어떤 사람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이런 오해를 갖곤 하지만), 지금의 법적, 제도적, 사회적, 문화적 가부장성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력행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하는 과정들은 또다시 공존을 배우고 서로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기쁘게도...) 내 개인적으로는 여성이기 때문에 받은 피해와 상처를 개인의 심리상담만으로 푸는 것 보다 자신이 처한 사회적 맥락을 배우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활동을 통해서 풀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소통과 진행의 방식이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 구성되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치유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져서 다른 사람들이 또 힘들어지는 일들도 있었다. 이는 나또한 당사자이기도 한데, 나의 경우에는 종종 무기력해지는 증세가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조금은 나를 이해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었다. 얼핏 보았을 때, 그간 생존자로서 받아온 격려에 딱 반대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 또한 나와 같은 생존자라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그것이 (사회적 활동을 하고자 하는) 나라는 사람의 자기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이런 과정에서 '나의 상처로 인한 증상을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다니 폭력적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반칙이다. 왜냐하면, 더 나아지지 않을 요량이면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평생 어리광을 부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요. 그로 인해 다른 동료들을 힘빠지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런 일들이 종종 반복되기도 하지만, 최소한 그런 발언이 반칙이라는 것은 분명히 하고 그 다음 서로에 대한 배려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그 자리에서 '너 반칙이야'라며 옐로우 카드를 주라는 얘기는 아니다. 분명히!!!) 주제넘는 걱정 그런데, 사실 이런 장면도 있었다. 누군가 '....하고 .......하다니 .....은 너무 폭력적이야!!' 라고 말하면 또 누군가는 '나는 .....한 맥락과 ......한 경험 때문에 .....한건데 그걸 폭력적이라고 하다니 정말 너야말로 폭력적인거 아니야?'하고 말하는 장면. 그야말로 상처와 피해를 경쟁하게 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이 경쟁들 속에서는 내가 약속을 10번 펑크를 내도, 자신의 상처를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전혀 귀기울이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세울 피해경험이 없는 사람이 그 모임에서 겪게 되는 불편함에 대해 대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가족/성/정체성/계급/지역 등 다양한 차이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나태함이 낳는 폭력이 얼마든지 난무할 수도 있다. 사실 여성주의자들이 새가슴이 되어버린 건 그 잠재적인 실수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정말 기우이지만, 그 조심함이 서로의 아픈 부분에 대해 서로 손도 대지 못하게 만들어버리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한참 치유 중인 사람과 이젠 디디고 한 걸음 나와도 될 사람들이 모두 꽁꽁 싸안고 상처에만 집중하고 있는 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감하게, 한걸음 더 나아가기 “마이너리티는 상처와 함께 태어나 고통을 통해 세상의 거짓을 깨닫는다. 그녀의 혜안은 상처와 함께 시작되어 스스로를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건강한 자아’라는 관념은 개나 주어버려라. 누구의 기준으로 무엇이 건강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건강’이라는 기준을 들이댈 수는 없지만, 정체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타인과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우리 모두가 아주 많이 부족해서 그 타인들과 손잡는 것이 서로간 어느 정도의 상처를 전제해야 하는 일일지라도... 끝이 어디인지 모를 가장 마이너한 감성의 새털까지 건드리지 않기 위해 가슴을 졸이며 말을 닫아 버리는 것 보다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마이너리티는 옳다. 그러나 모든 마이너리티는 항상 옳다라고까지 확대되어 버리면, 남는 것은 상처의 경쟁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과는 최선을 다해 부대끼고, 싸워야 할 때에는 굽히지 말고(혹은 지치거나 귀찮아하지 말고) 싸우는 일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스스로와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미지출처 lunatree.net/archives/ cat_diary.html http://www.kangwhado.co.kr/kangwhado7/bbsUpFiles/아기와%20발.jpg * 이 글을 퍼가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 (www.unninet.co.kr) 2004년 9월 특집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