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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by eunic 2005. 3. 16.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글. 페이퍼문(sidestory101@empal.com) / 언니네 편집팀, 황소자리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中> 고정희



여성과 피해자라는 같은 얼굴

요즘은 자꾸 여성이 무엇인가? 라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눈에 보이는 악의와 부정의를 쫒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다가, 문득 숨을 고르고 있다보면 어느새 다른 모습을 한 악령이 어깨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깨는, 그런 가위에 눌리기도 합니다. 이건 병이야. 아니야 이건 병이 아니야. 이건 저항이야. 라고 미친년처럼 몇 번이고 혼자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가 하기도 합니다. 마음속에 들리는 소리는 선연합니다.

“나는 여자가 싫어”

이 말은 바로 다시 나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옵니다. 급하게 다시 말을 바꿉니다.

“나는 가부장제에서 말해지는 <여자>가 싫어”

하지만 여자가 되지 않고는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폭력들이기 때문에, 그 폭력을 고발할 때에는 먼저 여자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거지요. 언젠가 그런 말을 자기만의 방에 쓴 적이 있습니다. 여자라는 존재 자체에 스며있는 존재하지 않음 설명되지 않음 모든 것에 대해 이해를 구해야하는 피곤함들에 대한 우울증들을 따라가다보면 울컥 남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기준과 개념으로 만든 역사에 대해 구역질이 맹렬하게 난다고, 그래서 남성들의 언어로 남성들을 비판할 때 그 언어 안에서 다시 타자화되고 대상화되고 조각나는 것 때문에 피해가 더 가중되기도 한다고 말이죠. 맥키논은 법체제는 강간 안에서 성교를 보지만, 피해자들은 성교 안에서 강간을 본다고 일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남성폭력에 의해 구성된 존재라는 깨달음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길을 잃은 것처럼 막막하게 만드는 깨달음입니다.

상처와 고통을 경쟁시키는 건 누구인가

지금까지 여성주의에서는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말해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라고, 거기서부터 모든 해답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유효합니다.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대해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 안팎의 일입니다. 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을 제외하고는, 94년 성폭력특별법, 95년 여성발전기본법, 97년 가정폭력 방지법, 99년 남녀차별금지법 등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금지하는 법률안이 제정된 것은 9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불법이 된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겨우 겨우 이름을 붙이는데 성공한 몇몇 폭력에 대해서조차 피해자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여성으로 취급되려면 피해자처럼 굴어야한다는 새로운 명령을 받게 된 상황이기도 합니다. 가장 피해자다울 때, 법과 사회는 그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기존의 “여성다움”이 주는 억압에 반대했던 여성들은, 새로 주어진 성역할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피해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권력들의 질문에 충실하게 피해의 증거로 벌어진 상처를 내보이며 이래도 믿지 않을거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그 피해를 입은 개인들에게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침해가 지속하는 권력관계들에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가장 피해자다운 여성이 누구인지, 그래서 법제도적인 틀 안에서 어떤 여성들을 보호할 것인지를 경쟁시키는 구도를 유지시키기도 합니다.남성사회에서 피해에 대처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이란, 피해를 입었다고 권리를 요구하고 분노를 표현하는 여성들이 아니라, 가장 피해입기 쉬운 취약한 상태인 동시에 자신의 취약함을 잘 알고 남성에게 보호를 위탁하고자 노력하는 여성들입니다. 뿌리 깊은 억압들의 공통점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는데, 억압에의 동의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유용한 방법은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데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자원을 최소화하면서 상처와 고통을 경쟁시키면서 피해자화의 함정을 파고 있는거죠.

피해자화를 넘어

여성운동은 여성 개인들의 경험들이 “개인들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 나만 이렇게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라며 손을 맞잡았던 기억이 그 유명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차별과 폭력경험의 공통점이 여성들 간의 연대를 만들어냈다는 명제는 여성이라면 (모두) 차별과 폭력을 경험했을 것이며 그러므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여성이 아니라는 대우명제를 충족시켜야 참이 된다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성운동과 피해자화 사이의 고리를 연결하는 악순환 원도표의 정점입니다.

반성폭력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피해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가지는 일,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자조모임에서 폭력의 정도와 고통의 크기를 서로 은근히 비교하며 상처를 주고 받게 되는 일,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지나친 기대, 자신을 돕는 여성들을 자신을 100% 이해하지 못해준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일 등등.. 피해자화의 함정은 이제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그리고 바로 나 자신에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피해자화의 무서운 점은 “우리”는 (모두) 단 한발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함을 만들어낸다는데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게 공감과 이해라 해도, 지금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하고 가능한건 상처받고 피흘리는 고통을 준 상대에 대항하는 것에 대한 연대와 지지일지도 모릅니다. 상처와 고통의 기억들을 역사화시키며 한 개인은 성장해갑니다. 그 과정 모두를 “집단화”하자는 것이 여성운동인 건 아닐 겁니다.
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해 인식하고, 집단화된 여성을 해체하고 개인이 되어가는 과정, 여성이 자기 자신이 되어 갈 수 있게 하는 과정, 우리가 바로 이 부분적인 과정에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피해자화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권력화 되지 않을 것, 그리고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것. 여전히 자매애는 힘이 세다고 믿을 것. 이 명제가 이번 특집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시타정희진은 그동안 여성운동에서 피해라는 말과 피해자라는 위치가 어떤 의미와 효과를 주었는지를 짚어보면서,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다시 “여성이라는 성역할”로 묶어두려는 “피해자화”의 함정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땐싸는 누가 가장 크고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얼마나 서로 가진 것이 없는지를 경쟁하는 것이 결국은 피해자화의 함정에 빠지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은 여성들이 그토록 어렵게 사용하는 피해자라는 말을 남성들이 쉽게 가져다가 사용하면서 피해 자체를 다시 사소화하는 현상에 대해 분노하는 글을 썼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요.) 야생싸가지와 여랑의 글은 우리가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해야한다고만 말해왔지 사실 어떻게 서로 대화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는 반성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이에 대해 꿈틀은 우리는 어떻게 서로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액숀 나우를 조제가 준비했습니다. 너무 차갑게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잘 되었을지는 모르겠네요.

각 필자 옆에 붙어있는 별자리들은, "우리"는 참 다르기도 하다는 인식을 환기시키기 위한 장치이자, 이 무거운 특집을 조금이라도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한 편집팀의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온도를 맞추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이 특집이 가을을 맞이하는 언니네 언니들에게 추울 때는 입고 더울 때는 벗는 유용한 새 옷이 되기를 기대하며, 9월 특집을 보냅니다.


* 이 글을 퍼가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 (www.unninet.co.kr) 2004년 9월 특집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