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학자 정희진

정희진의 번신- 가족, 국가 그리고 세습의 기원

by eunic 2010. 11. 8.

정희진의 번신(飜身)

가족, 국가 그리고 세습의 기원

BY : 정희진 | 2010.10.25 |

<번신>은 20대에 인상 깊게 읽은 중국 혁명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은 사유의 시작으로서 몸(身), 소통과 변화로서 번(飜)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공부를 좋아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지구상 최빈국’외에도, 북한에 대해 서방 세계가 만든 주된 이미지는 세습으로 상징되는 ‘봉건 왕조’, ‘폐쇄적/광적 민족주의’다. 한국사회의 맥락과 달리, 서구에서 민족주의는 쇼비니즘(chauvinism), 파시즘, 인종주의와 연결되어 해석된다. 나는 몇 년 전 북한을 “봉건 군주가 지배하는 사이비 사회주의”라고 간단하게 정리하던 서구 맑스주의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좌파 진영에게 인기 있는 영국 백인 남성인데,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 여부를 떠나, 북한에 대해 저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고 구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감탄’한 적이 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등장이 공식화된 이후, 우리사회의 여론은 각각 향후 대책(?)은 다르더라도 진보, 보수 관련 없이 일단 ‘3대 세습’ 비판에는 이견이 없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 비판에 따라다니는 ‘작은 목소리’가 있다. 북한 세습도 문제지만, 재벌을 필두로 한 한국사회의 전반의 계급 재생산 고착도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반론’이 제기된다. 국가권력의 세습과 재벌, 교회, 공무원 사회 등 국가보다 작은(?)단위의 세습은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는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초월하거나 아우르는 모든 국민의 대표체지만(그래야 하지만), 기업 같은 ‘사조직’은 어차피 개인(집안)의 소유이므로 세습의 폐해가 국가보다는 적을 것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물론, 이는 현실도, 진실도 아니다(오히려 지금 한국은 국가도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집권하고 있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중립적 기구가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으며, 그렇게 기대하는 사람도 드물다. 어쨌든, 우리는 한국사회의 세습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인 것 같다. 가족 단위의 모든 세습은 “경영권 승계”, “계급 재생산”, “명문가 출신” 등 다양한 완곡어법이 있는데,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은 “세습”으로 용어가 고정되어 있다.

북한 세습은 나쁘다, 북한만 세습 하나?식의 ‘지당하신 말씀’을 반복하는 논의 방식에서 벗어나 볼 수는 없을까? 조금 결이 다른 비유일수 있지만, 어떤 사회에서 악수는 적대감의 표현일 수 있고, 어떤 지역에서는 귀한 음식인데 다른 지역에서는 식용은커녕 혐오감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체제 경쟁, 우열의 차원을 떠나 북한은 남한사회과 운영 원리가 전혀 다르다. 북한사회의 내부의 인식이 정당하거나 정의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사회에서 ‘독재’는 전제(專制)나 폭정의 의미라기보다는 정치의 본질인 당파성과 관련이 있고, 언론은 표현의 자유의 영역이라기보다 사회구성원에 대한 교양 수단이다. 북한의 선군(先軍)정치는 군부독재가 아니다. 이는 북한 사회 전반의 군사화와 관련된 문제이지, 군대가 정치를 지배하는 쿠데타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구 선진국’처럼, 당이 철저히 군을 통제하는 문민 통제(civil control)에 가깝다.

‘북한의 3대 세습’과 ‘삼성(으로 대표되는 남한)의 3대 세습’의 본질적 공통점은, (세습이 아니라) 가족을 모델로 운용되는 조직 원리에 있다. 국가, 회사, 군대, 동창회, 노동조합, 학교, 교회, 사회복지 시설 등 거의 모든 인간의 결사(gathering)들은 의사(擬似), 유사(類似) 가족이다. 그리고 “직원을 가족처럼”, “형제애”, “건국의 아버지(어버이 수령)” 이런 담론처럼 이상적인 가족 구조와 비슷할수록 훌륭한 조직으로 인식된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가를 “사회문화적 유기체”라고 부르짖는데 비해, 한국사회는 그보다는 좀 덜 노골적이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아니,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가족주의 실천은 남한사회가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세습이 아니라 세습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 가족에 대한 인식을 문제화하고 싶다. 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모든 조직에 확대 적용하고,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닐까? 사회를 공동체가 아니라 유기체(organ)로 사고하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까? 공동체와 달리 유기체적 인식은 구성원에게 ‘각자의 역할(기능)’이라는 이름으로 위계를 정상화하고(‘분업’), 이를 생명체의 원리로 만들어 자연의 법칙인양 삼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직이 인간의 몸(政體)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간의 권력 차이, 이해(利害) 관계는 성별, 세대에 따라 매우 다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조직도 그 구성원의 이해는 균질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국가나 가족은 일시적인 연대체, 정치적 관계, 사회적 제도이지, 실체로서 ‘운명공동체’, ‘하나의 몸’이 아니다. 따라서 국가나 가족은 이해관계의 변화가 있을 뿐이지, 조직의 영속 즉, ‘선대(世)를 잇는다(襲)’는 개념은 불가능하다. 조직은 제도이지 생명체가 아니다. 모든 세습이 끔찍한 것은, 섞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항체도 없는 유기체를 양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트랙백주소 http://hook.hani.co.kr/blog/archives/14521/track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