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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경향] [정희진의 낯선 사이]‘지속 가능한 복지’의 反복지성

by eunic 2011. 10. 19.

[정희진의 낯선 사이]‘지속 가능한 복지’의 反복지성


정희진|여성학 강사

무상급식을 둘러싼 서울시 주민투표는 먹고사는 문제, 즉 정치의 본질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일상이 전장이다’라는 진리를 모든 시민(혹은 전 국민)이 경험하고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180억원을 넘었다는 선거 비용은 낭비가 아니다.


이 문제는 계속 토론되고 사유되어야 한다. 이 돈을 시민 정치교육 비용으로 생각한다면, “꺼지지 말아야 할 불씨(복지 이슈)를 살리기 위한… 밀알이 되겠다”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사는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 엄마는 교직에 종사하면서 연년생 삼남매를 두셨는데, 1980년대 내내 매일 새벽 도시락 6개를 준비하고 출근하셨다. 무상급식을 포퓰리즘과 연결하는 것은 극소수 정치인의 시각이다. 학교급식이 절실한 사람은 결식아동과 더불어 매일 도시락을 싸야 하는 수백만 가사 노동자이다.


또한, 이번 투표는 질문의 정치학의 좋은 사례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 것 자체를 민주주의라고 오해한다. 민주주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질문의 내용이지 질문 행위가 아니다.


이번 투표는 일종의 이런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쟤를 차별할까요, 말까요?” “차별을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이것은 폭력이지 질문이 아니다.


한편, 정책의 정당성 문제와 별개로 집행이 불가능하거나 정책 취지를 의심케 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오럴 섹스가 불법이라는데, 어떻게 적발할까? 부모 소득 하위 50% 해당자를 골라낼 방법이 정말 궁금하다. 부모가 이혼했을 경우는? 부동산은 있으나 현금이 없는 경우는? 배우자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떻게 호구조사를?


위에 적은 것만 해도 흥미로운 논쟁거리지만, 내게 백미는 ‘지속 가능한 복지’론이었다. 1990년대 소위 문민정부 이후 보수세력이 저항적 시민사회의 일부가 되면서 기존 진보진영이 전유(專有)했던 자유, 인권, 평화 등의 용어를 보수세력이 전유(轉有)하기 시작했는데, ‘녹색성장’처럼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절정을 이룬 느낌이다. 이러한 ‘전복적 언어’ 실천은 바람직하다. 좋은 말은 서로 쓰려 하기 때문에 ‘진정한’이라는 수사를 앞세우며 독점을 위해 투쟁하기 마련이다. 이 새로운 언어들을 ‘오용’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쉬운 방법이다. 문제는 비판보다 사유하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이다.


‘지속 가능한 복지’는 그 유명한 용어,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의 오세훈식 ‘재해석’인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지속 가능한 발전은 경제성장과 상업화가 환경위기의 근원으로 인식되면서 자연과 시장경제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재조정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이 상태로 경제성장을 계속 추구하다가는 지구 자원이 바닥나므로 아껴 쓰자는 것이다.


사실, 지속 가능한 개발도 시장경제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는 강대국 주도의 대책이지만, 그나마 “천천히 개발하자”는 약간의 걱정과 성찰을 담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이 말은 환경운동의 구호로, 시장경제 반대론으로 엉뚱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시장경제는 자연을 현금으로 만들지만, 반대로 현금은 자연의 생태과정으로 변환될 수 없다. 고갈은 필연적이다.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원리가 생명 유지일 때 자연은 공공의 재산이지만, 이윤과 부의 축적(그리고 축적 후의 복지 시혜!)이 사회 조직원리가 될 때 자연은 자원이 된다. 경제 지상주의 가치관에서 성장과 복지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과 ‘발전’은 모순적 해결책으로서 ‘말이 되지만’, ‘지속 가능한 복지’는 그렇지 않다. 복지는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생명 유지를 위한 것이므로, 지속 가능과 복지는 동의어이다. 두 번 쓸 필요가 없다. ‘지속 가능한 복지’는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복지를 시장 친화 용어로 변질시킨다. 수식어의 기본 기능은 의미의 한정이다. ‘지속 가능’은 복지의 수식어로서 복지의 개념을 축소, 왜곡한다.


‘지속 가능한 복지’는 생명을 보류, 선별하자는 구호다. 복지를 현재의 삶과 대립시켜 미래의 목표로 만드는 것이다. 시민권으로서 복지는 부자와 빈자, 사회 구조의 가해자와 피해자, 시혜자와 수혜자를 분리할 수 없는 당위다. 가정경제가 나라경제의 토대라면, 학교급식은 복지 이슈가 아니라 단지 일상적인 경제활동이다.


‘모래사장(沙場)’이나 ‘역전(驛前) 앞’처럼 동어반복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같은 말인 줄 알지만 습관적으로 쓴다. 이런 동어반복은 세련된 사회적 약속(언어)은 아니지만 공동체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복지’, 이 동어반복은 반사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