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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경향] 정희진의 낯선 사이]‘나가수’의 경쟁 개념

by eunic 2011. 10. 19.

[정희진의 낯선 사이]‘나가수’의 경쟁 개념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MBC TV의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이하 ‘나가수’)은 “아름다움이 우릴 구원할 거야”를 실감케 한다. 더불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상실한 자의 특권이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길”…. 예술의 창조자는 남겨진 자, ‘버려진 자’, 그래서 ‘쿨’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떠나는 사람이 “내가 널 찼다네~”, 이런 내용의 노래는 가능하지 않다. 그들은 말할 말(내용)이 없기 때문이다(‘할 말이 없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음치에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조차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노래가 많았구나 놀란다. 가수들의 인터뷰는 하나같이 철학적이다. 그들의 치열함, 성실함, 도전과 열정이 부럽다. 매사에 동기부여가 안 되는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를 생각하며 운 적도 있다.



‘나가수’의 결정적인 경쟁력은 이 프로그램이 한국 사회의 가장 논쟁적인 용어 중 하나인 경쟁 개념을 변화시킨 데 있다고 생각한다. 경쟁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요약하면, “경쟁은 사회적 생산성을 높인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은 역효과가 있다” 정도일 것이다. 경쟁은 곧 삶의 방식이며 나아가 인간의 수월성의 한계를 독려하는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간주된다.


한편 이러한 통념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경쟁 원리 자체의 비인간성, 경쟁 과정의 불공정성, 생산력 지향의 현대문명에 대한 성찰 등을 주장한다.


음악은 등수를 매길 수 없다, 탈락자가 나오는 것은 잔인한 처사다,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살벌한 프로그램이다 등이 ‘나가수’를 둘러싼 주된 비판 여론인 듯하다. 나는 이러한 의견이 진부하며, 진부함이 구체적 현실에 일반적(비현실적) 통념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볼 때 ‘틀린’ 진단이라고 본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경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가학적 쾌락’을 향유하는 시청자가 나 외에도 있다면, 위의 비판은 표리부동한 견해다. 진부함과 표리부동은 우리 사회에서 여론이 형성되고 작동하는 대표적인 장치인데, 이러한 언설 방식의 특징은 ‘효력 없음’이다. 하나마나한 말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경쟁’과 ‘스트레스’를 머리에 이고 입에 달고 산다. 개인의 건강 상태는 경쟁의 부작용 여부에 달렸고, 인생의 승부는 경쟁의 결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현실 인식이 일종의 착각 혹은 ‘인지 오류’라고 보는데, ‘나가수’는 이를 증명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실현되는 경쟁 방식, 규범, 결과는 기존의 경쟁 개념과 완전히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탈락한 가수가 노래를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나가수’는 철저한 순위 프로그램이지만 경합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다양해서 정의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나는 트로트풍의 발라드 가수를 좋아한다. 내가 ‘쓰러지는’ 노랫말은 절망과 퇴폐(?)가 주제인, “만사가 어쩔 수 없네~”식의 루저의 한탄이다. 그렇지 않은 노래는 내 흥을 깬다. 미션곡 명칭처럼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들의 상황에 따라 또다시 변한다. 감동 여부는 타인의 취향 문제이기에, 감동의 순서는 개인의 몸 안에서 작용하는 그 순간 마음의 행로이기에,


감동의 깊이를 재는 자(尺)는 노래하는 이와 듣는 이의 헤집을 수 없는 인생사가 쥐고 있다. 순위는 언제든 변할 태세다. ‘나가수’의 경쟁 조건이 대단히 유동적, 맥락적, 유목적, 과정적, 횡단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성’의 상대어들이다. 다른 경쟁처럼 학벌, 외모, 집안, 지역 등에 따라 경쟁 조건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면서 마치 자연의 법칙인 양 행세하지 않는다. ‘나가수’ 등수는 입시, 판매액, 조직 내 지위처럼 절대적, 획일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나가수’의 순위는 가수의 개성, 특장, 공연 당일의 심정, 몸과 현장의 삼투성, 선곡, 편곡, 관객과의 상호작용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여기 적은 것 외에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평가요소들이 더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각자 자기 세계에서 자기 안의 여러 모습과 경쟁하는 것, 일명 ‘자기와의 싸움’. 반사회적이지 않다면 자신이 가치를 부여한 삶에 몰두하면서 지배적인 사회적 시선에 덜 휘둘리는 삶. 타인과 비교하며 다르게 살기보다 자신의 이전 모습과 다르게 사는 것. 경쟁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경쟁의 조건을 둘러싼 기존 개념을 혼란시키고, 확장하며, 끊임없이 재정의하는 것. 이러한 ‘나가수’의 경쟁 개념이 사회 전반에 침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