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은닉의 산문

와눈헤쿤 <그러나, 기억하라>

by eunic 2005. 3. 2.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모르고 한일인데‥

가을이 깊다. 거의 끝자락에 온 듯하다. 이제 곧 저 찬란하게 물든 잎새들은 지고, 낙엽마저 세찬 바람에 날리다 마침내 서리에 하얗게 덮이리라. 그렇게 가을이 가기 전 <그러나, 기억하라>(윤지련 극본, 최창욱 연출)를 만난 것은 작지만 단단한 기쁨이다.
문화방송 베스트극장 600회 특집으로 지난 5일 밤 안방극장을 찾은 단막극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재난 후일담’을 이야기 소재로 삼았다. 아직 기억에 생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 환(김정근)의 이야기가 큰 축이다. 환은 아내(신은정)를 따라 프랑스로 가기 위해 청국장을 좋아하면서도 프랑스 요리를 전공할 정도로 아내를 사랑한다. 드라마는 초반 임신한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해주고, 배가 눌리지 않게 머리를 감겨주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숨이 ‘막힌다, 사랑한다’는 아내의 휴대전화를 받고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면, 끝없는 절망의 심연에 갇히고 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는 절망을 술로 달랜다. 누구 하나 뚜렷한 원망의 대상을 찾을 길 없는 상황을 맨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취기 속에서 문득 문득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의 비극을 부른다. 술김에 싸움을 벌이다 차에 치일 뻔한 그를 구해내고 결혼을 앞둔 경찰관이 숨진다.
그 경찰관의 애인 선영(정애연)은 이미 아이를 품은 채다.
여기서부터의 이야기는 사실 쉽게 짐작된다. 둘은 만나 갈등과 번민 속에서도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위안이 돼 준다. 결론이야 그래도 넘어설 수 없는 서로의 아픔 탓에 이별을 하거나, 우여곡절 끝에 새 희망의 근거를 만들거나이다. <그러나, 기억하라>는 후자를 택함으로써, 평이한 설정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이런 짐작 가능한 이야기를 통해 감동을 준다. 그건 드라마 곳곳에 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아내를 잃은 남자 때문에 애인을 잃은 여인은 ‘미안하다’고 하는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눈헤쿤.” “라코타 인디언들에겐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 그런 말이 없대요. ‘와눈헤쿤’, 모르고 한 일이라는 뜻인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모르고 저지른 잘못에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거죠.” 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은 참 오랜만에 편한 잠에 빠져든다.
환의 장모(윤여정)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 또한 기억될 만하다. 그는 가끔 사위를 찾아, 예전에 남자가 아내에게 했듯이 사위의 머리를 감겨준다. 사위가 끝내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통렬한 성찰의 화두를 던지는 것도 그다. 사위가 “왜 하필 우린데? 왜 하필 수현(아내)이었는데?”라고 절규할 때 그 역시 울먹이며 말한다. “나 그거 수천번, 수만번 해봤는데…. 환아. 질문이 틀렸더라. 왜 다른 사람은 되고, 우린 절대 안돼?” 아픔과 상처의 기억은 눈물겹고, 그 눈물을 머금고 피어난 또 하나의 사랑과 희망은 마지막 가을빛살마냥 찬란하게 아름답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아침에 이 기사를 지하철에서 읽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화장지도 안 갖고 다니는데,,.. 슬픔이 증폭돼 콧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한 세 번을 읽었다. 그때마다 눈물이 났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를 잃어버린 남자의 마음,
윤여정의 담담하고도 울림이 있는 대사 때문에
사실 주변에 그런 대형참사나 재해 때문에 죽은 친척도 가족도 없는 나에겐
주변 사람의 죽음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까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그렇게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상황에서 나는 어떨까?
나는 잊을 수 있을까?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하고.
한없이 슬퍼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나중에 겪을 일을 미리부터 생각하고,
마음자세를 가다듬는 일은 정신건강에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남의 기억과 감정이 나의 기억처럼 각인되고 전이되는경험은
좀처럼 경험하기 힘들어서 슬픈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다 좋다.
역시 베스트극장 300회와 600회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은닉의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등사에 다녀오다  (0) 2005.03.03
좋아해와 사랑해  (0) 2005.03.03
내다버릴 하트  (0) 2005.03.02
재활지원과장에 뽑힌 안규환씨  (0) 2005.03.02
스위트피의 마지막 콘서트  (0) 2005.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