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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의 산문

재활지원과장에 뽑힌 안규환씨

by eunic 2005. 3. 2.


복지부 장애인 재활지원과장에 지체2급 장애인인 안규환씨가 뽑혔다.
각 신문사별 제목을 보고 내용을 읽어보니 어떠한 기사쓰기가 맞는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장애인 고통 안겪은 사람은 몰라요>라는 조선일보 기사를 읽다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버스를 손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학교를 통학했던 이야기나 장애라는 이유로 대한민국에서 좋다는 대학을 나오고 교수님 추천까지 받은 그에게 끝내 합격통보를 해주지 않았던 취업 에피소드는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모든 신문에 이 기사가 나오게 된 이유는 비 장애인이 장애인 정책을 만들어 온 관행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장애인들의 고통과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장애인 정책입안자가 됐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신문이 그 사람이 장애인 단체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거나 그가 생각하는 장애인 정책의 비전보다는 '장애인'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제목을 뽑았다. 장애 관련부서에 장애인 뽑혀 등의 제목으로 말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그의 인생역전 스토리는 다음에 쓰면 안될까?
그도 장애인이기 이전에 능력있는 보통의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섰음을 써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설령 그의 장애가 선정에 조금은 플러스를 줬다 하더라고 그 자리에 그가 앉았어야만 하는 이유로 전개하는 것이 바른 기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나는 이제야 털어놓지만 한겨레의 왕 팬인데서 비롯됐다.
안규환 씨를 다룬 한겨레 기사를 읽는데 "이건 무미건조하군, 중앙일보와 경향은 안씨가 대통령 인수위에서 활동했다는 (낙하산 인사일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기는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비하인드
스토리도 올려놨는데.... 한겨레 이번엔 왜 이렇게 쓴 거야?"
아. 무미건조의 감정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뿔싸'하고 깨달음이 왔다.
한겨레는 그의 장애인으로서의 겪은 눈물나는 지난날을 술회하는 내용보다는 그가 몸담아온 단체를 나열함으로써 그가 7명의 지원과정 중에서 뽑힐 수 있었던 이유를 말했다.
그를 장애인으로 본 게 아니라 그가 장애인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해왔으며 다양한 장애인 정책 관련업무를 해 왔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결국 한겨레 기사는 장애인을 주제로 쓰지 않았고 그가 재활지원과장으로서의 능력을 기술한 것이었다.
(이 글이 한겨레 팬이 무조건적으로 합리화, 미화했다는 비판을 들을지라도)
이외에도 <장애인 정책 아직도 장애상태, 지원보다는 자활에 중점둘래요>라는 동아일보 기사는 그 점에서 다른 일반 신문들과 다르다.
안씨나 장애인들이 생각하는 '수혜가 아닌 자립' 측면에서 장애인 정책이 나아갈 바를 제목으로 뽑았고 내용도 구구절절하게 감정에 호소하는 에피소드를 최대한 자제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안 읽어도 되는 지극히 내 사견보도자료를 보면 그는 제주대와 서울대라는 대학을 2개 나왔다. 그렇지만 기사화 되는 과정에 기자들은 제 나이에 들어간 서울대만을 썼다. 그가 제주대를 나와서 다시 서울대를 들어갔다면 그들은 또 서울대를 나왔다고 쓰지 않을까.
서울대는 하나의 기준이다. 그것은 언제나 선택되는 단어중의 하나다. (학벌 콤플렉스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다리가 불편해 목발을 짚고 있어 다른 장애를 가진 시각·청각장애자 등 신체·정신장애 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클 수 있지만 그가 볼 수 없는 것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장애인의 고통을 전적으로 다 알 수 없다.머리를 다쳐 말을 못하는 사람 앞에선 말을 하는 그는 상대적으로 나은 사람일수도 있다.
그에게 너무 큰 기대나 너무 많은 동정은 필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