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우의 벗기기나 촌스런 나쁜 영화는 키치일 수 있지만, 시장에서 장사하는 뚱뚱한 중년 아주머니의 몸빼 바지는 진짜 촌스럽다.
그것은 노동과 남루함의 상징일 뿐, 키치가 될 수 없다.
정희진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내 요즘 생활의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삶은 남루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루하다는 것은,이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를 경계로 나의 생활은 똑같았으나,평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수아가 쓴 일요일 스키야키식당에 나오는'노용'이란 사람은 방이 열두 개나 되는 대저택에서 태어났으나, 일을 하지 않는 대신에 남들이 먹다 버린 음식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기행을 한다.
나는 노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내 자신이 노용같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풀밭에 누우면 풀만 보인다'고 <앨비라 마디간 > 영화에서 그랬다.
이건 연애에 빠진 두 연인의 머릿속을 뜻하진 않는다.
한동안 사람을 멀리했고, 사람이 싫었던 나는 남들 사는 것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즐거움을 느끼고, 어떻게 시간을 소비하며 사는가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 세계에 빠져 내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의 생활에 그저그렇게 만족해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빈곤의 문제가 그냥 픽픽해대던 소리에서 현실이 됐다.
돈에 쪼들리지 않았을때 단순히 밖에 나가서 소비생활을 하지 않고 집에서 책만 읽는 것과 돈이 없기 때문에 책 한권 사는 것도 사치라고 여겨져 아예 나갈 생각을 단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임계점에 다다른 것이다.
가난에 대해서 내 마음이 평정을 유지하는냐 마느냐의 경계에 왔다.
이 상황에서 갈 곳도 없다.
그리고 이 상황 자체를 변화시킬 용기도 없다.
이 가난속에서 울분을 터트리지 않고 이전처럼나는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할수 있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예전에 갔던 한 여성학 강좌에서 한 여학생은 "행복의 샘플이 단순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것처럼 다양한 의미의 행복이 존중받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도 세상 다수가 원하는 하나의 행복을 원해서 갑자기 불행함을 격하게 느끼는지 모른다. 27살, 부모님에게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미안함, 갑자기 커버린 속물근성 때문에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됐는지 모른다.
새해를 시작하는 내 마음엔 빈곤과 인권의 상관관계만이 들어온다.
무엇을 보든간에 빈곤과 인권으로 대입시켜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것이 정신건강에 무척 해롭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올해안에 결론을 내릴 것이다.
어렵게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채 사는 '다른 종류의 행복을 성취한' 사람들의 편에 합류할 것이냐, 아니냐가 결론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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