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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中

by eunic 2005. 6. 3.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中


어렸을 때 나는 사랑하는 것은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아주 깊은 속에 있는 아주 내밀한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서로에세 옮겨주듯 말해주는 것, 비밀을 나눠 갖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그는 알아듣는 것이 사랑이라고. (중략)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힘겼게 내 마음을 말하면 그는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버렸다.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좀더 자라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원이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 다는 것은 약한 나의 존재를 얼마나 안정시켜줄 것인가. 새벽에 혼자 깨어날 때, 길을 걸을 때, 문득 코가 찡할 때, 밤바람처럼 밀려와 나를 지켜주는 얼굴. 만날 수 없이 비록 그를 향해 혼잣말을 해야 한다 해도 초생달같이 그려지는 얼굴. 그러나 일방적인 이 마음은 상처였다. 내가 지켜주고 싶은 그는 나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좀더 자라 누구나 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갖고 싶은 꿈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랑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거기다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사랑은 영원해도 대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했을 때, 사랑이란 것이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중략)

점점 나는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했다. 순수하게 사람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잃은 듯했다. 그가 누구인지 조금 궁금해하다가 지나쳤다. 그 또한 내가 누구인지 조금 궁금해하다가 지나갔다. 서로 그냥 조금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불러보다가 지나갔다. 그가, 혹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체물들이 많이 생긴 탓이겠지, 생각했다.

사랑은 점점 그리움이 되어갔다. 바로 옆에 있는 것, 손만 뻗으면 닿는 것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다가갈 수 없는 것, 손만 뻗으면 닿는 것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다가갈 수 없는 것, 금지된 것, 이제는 지나가버린 것,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향해 그리움은 솟아나는 법이다. (중략) 그리움과 친해지다보니 이제 그리움이 사랑 같다. (중략)

사랑이 와서, 우리들 삶 속으로 사랑이 와서, 그리움이 되었다.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사라지고 멀어져버리는데도 사람들은 사랑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은 건 사랑의 잘못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의 위력이다. 시간의 위력 앞에 휘둘리면서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우리들의 내부에 사랑이 숨어살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들의 내부에 사랑이 숨어살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아이였을 적이나 사춘기였을 때나 장년이었을 때나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해 지나간 이름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 신경숙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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