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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아니 에르노의 집착

by eunic 2005. 4. 18.
자초한 고통의 기록들


아니 에르노 소설 ‘집착’출간
내가 버린 그에게 새 애인이…
충격적 소재·날선 감정 ‘꿈틀’

<단순한 열정>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69)의 2002년작 소설 <집착>(정혜용 옮김, 문학동네)이 번역 출간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이 찬탄과 논란을 함께 불러일으킨 것은 선정적으로 보일 정도의 충격적인 소재, 그리고 그 소재를 다루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글쓰기 태도 때문이었다. 초로의 대학 교수인 작가 자신이 연하에다 유부남인 동유럽 외교관을 상대로 벌인 열정적인 사랑의 기록이 바로 <단순한 열정>이었다.

<집착>은 <단순한 열정>의 작가가 여전히 날선 감정과 녹슬지 않은 글쓰기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나’는 6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헤어진 연하의 남자가 새로 사귄 여자에게 새삼스럽게 맹렬한 질투에 사로잡히는 역할을 맡는다.

제 편에서 싫증이 나서 헤어지게 된 남자의 새 여자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정상적이거나 합리적인 노릇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이성적인’ 판단은 주인공이 빠져든 감정을 설명하거나 그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주인공은 어떤 의미에서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고통을 솔직히 기록할 따름이다.

이 ‘피학 취미’의 인물은 “나는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도 그 고통을 더 사랑할 것”(50쪽)이라고 호언한다.

고통을 초래한 것이 자기 자신이었던 만큼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자신의 힘에 의할 수밖에 없다.

고통과 혼란의 얼마간이 지난 뒤 주인공은 마침내 남자에게 최종적인 결별의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된다. 감정은 정리됐고, 일상은 다시금 평온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지난 고통의 시간은 무익했거나, 심지어 유해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고통의 대가로 얻은 글이 남았다.

“글쓰기는 더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 즉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하던 감각을 간직하는 방식, 그러나 이제는 ‘사로잡힘’이자,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으로 변해버린 그것을 간직하는 방식이었다.”(68쪽)

최재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