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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신영직

by eunic 2005. 4. 4.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

신명직 지음 /현실문화연구 펴냄·1만5000원



매체명 한겨레
작성일 2003-02-22

근대적 도시 공간은 균질적인 욕망을 생산, 전파하는 일종의 미디어다.

그리고 이 미디어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는 도로·철도·전차·공원·박람회·백화점·카페·극장·라디오·신문·유성기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재구성·재배치되어 탄생한 근대적 도시는 인간의 욕망을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자본의 의지’를 충실히 실현하는 장이 된다.

이제 도시인/근대인들은 자본과 결탁한 권력이 만들어낸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저 휘황한 근대성을 경험한다.
1930년대 경성, 식민지 자본에 의해 계획적으로 구성된 근대적 도시 경성은 조선인들을 일거에 포획해 버린다. 불가항력의 거대한 블랙홀! 이 블랙홀을 유성처럼 떠도는 인간군상들이 등장한다. 조선옷에 에이프런을 두르고 고무신에 히사시가미를 한 채, 빨간 술을 마시며 ‘몽빠리’를 노래한다.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기묘한 이미지가 공간을 배회하는 산책자 석영 안석주(1901~49)의 시선에 포착된다. 이른바 ‘만문만화’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장르를 통해 그는 30년대 경성의 풍경을 그려낸다.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는 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안석주의 그림과 글을 통해 경성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근대성이라는, 두루뭉술한 개념에 답답해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당시의 삶을 사실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동시대에 생산된 문화적 텍스트들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예컨대 이상이 〈날개〉에서 그리고 있는 ‘유곽과도 흡사한 33번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주인공이 투신자살하기 위해 올라간 화신백화점은 어떠했을까라는 물음들에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상섭과 이상, 박태원 등이 그려낸 경성의 풍경과 안석주가 그리고 있는 경성의 풍경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소설과 만문만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충분히 고려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책자 안석주의 시선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냉소적이다. 한강에서 ‘러브씬’을 연출하는 ‘탕남탕녀’들과 자유연애와 결혼을 보는 눈길이 특히 그러하다. 따라서 뚜렷한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신문이 태생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상업적 선정주의에 맹목적으로 이끌려서는 이 책이 지닌 많은 미덕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하는 풍경을 기묘하다고 했지만, 어찌 보면 이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이라고 그때와 다를 게 뭐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근대를 구성하는 핵심 원리들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의연히 자기논리에 따라 작동하며, 자본과 짝을 이룬 권력은 구성원들의 탈주를 치밀하게 감시해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이 책이 보여주는 풍경 너머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선태/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