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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우아한 노년 /데이비드 스노든

by eunic 2005. 4. 4.

[정재승의 책으로 만난 과학]
우아한 노년 /데이비드 스노든


매체명 한겨레
작성일 2003-11-29

정말 좋은 책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으면, 괜히 인터넷서점 독자서평 근처를 어슬렁거리거나 사람들을 만나면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게 된다.

요즘 내게도 그런 책이 하나 있는데 데이비드 스노든의 〈우아한 노년〉(사이언스북스)이 바로 그런 책이다.

내가 스노든 박사를 알게 된 건 몇 해 전 일이다. 대학원 시절,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의 뇌를 컴퓨터로 모델링하는 연구를 학위논문 주제로 잡다 보니 치매 관련 논문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만 했다.

그런데 1995년부터 치매와 관련해서 독특한 제목의 논문들이 학계에 보고되기 시작했다.

‘수녀 연구를 통한 치매환자의 언어능력 감퇴에 대한 분석’처럼 ‘수녀 연구를 통한’이란 말이 붙은 논문들이 켄터키 대학교 샌더스 브라운 노화연구소 의사들에 의해 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수백 명의 수녀들을 부검하고 뇌 영상을 찍어 치매 연구를 할 수 있었을까? 이 오랜 의문을 한순간에 해결해준 책이 바로 올해 초 번역 출간된 〈우아한 노년〉이다.


켄터키의대 신경과 교수인 데이비드 스노든 박사는 종교인들의 식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던 중 수녀들이 수녀회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오랜 노력 끝에 미국 노트러데임 교육 수도회의 수녀들을 대상으로 알츠하이머 치매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미국 국립보건원으로부터 지원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10년 가까이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면서 사후 뇌 기증을 약속한 75살 이상 수녀 678명의 뇌를 조사해 치매 연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그들이 지난 8년 동안 내놓은 36편의 연구논문들은 모두 수녀들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치매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수녀님들의 100세 건강법은 무엇인가 같은 식의 의학 지식을 배우는 것은 ‘정말이지’ 부차적인 것들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감동은 ‘과학자와 수녀’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 속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인지기능 테스트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고 성실하신 수녀님, “이곳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아”라고 말하면서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치매 말기의 수녀님.

이들의 해맑은 미소 속에서 출세를 꿈꾸며 더 많은 연구비를 따기 위해 애쓰는 현실적인 의사는 작은 깨달음은 얻어간다.


데이비드 스노든이 수녀원에서 배운 것은 치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삶과 노년에 대한 지혜였다.

치매 연구는 단순히 뇌의 신비를 벗기는 차원을 넘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우아한 노년을 맞고 싶은 모든 인간들을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할 학자적 임무였던 것이다.

정년은 줄고 수명은 길어져 ‘사회적 노년’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이때,

우아한 노년을 위해 질병과 싸우는 과학자와 우아한 노년을 실천하며 살고 계신 수녀님들의 만남이 빚어내는 감동의 에세이를 꼭 읽어보시길 강추한다!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