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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전통이란 이름의 학대, 여성할례

by eunic 2005. 3. 3.

전통이란 이름의 학대, 여성할례

[일다 2004-08-24 15:38]




<이 기사는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WAW(Women Against War)가 개죄한 7월 열린세미나-킴 론지노토 감독의 영화 <잊지 못할 그날> 상영회-에서 ‘여성과 폭력’에 관해 필자 강진영님이 발제한 내용을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킴 론지노토 감독의 영화 <잊지 못할 그날>은 케냐를 배경으로, 여성할례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할례를 받은 나이 든 여성들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이들에게 할례의 기억은 곧 고통의 기억이며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경험한 많은 여성들이 다시 자신의 딸에게 할례를 시킨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여성할례의 기억, 저항의 움직임
여성할례가 전통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사춘기를 전후로 할례 시술을 받는다. 클리토리스를 잘라내거나 꿰메어버림으로써 어린 아이들을 ‘순결한 여성’으로 봉인시키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미나는 자신이 할례 받던 일을 항상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결혼을 해서 묶어둔 클리토리스를 풀어야 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병원에서 그것을 하는 것에 대해 “나에 대한 망신”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그는 아내가 겪을 고통과 합병증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의 비웃음을 살 테니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나의 권한이고 결정”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아내의 몸은 남편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클리토리스’를 잘라버려야 아름다워질 수 있고, 할례를 해야 여성의 바람기를 막을 수 있다고 설파한다. 여성의 성과 몸을 통제하겠다는 생각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할례의 전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흡수되어 있는 생각이다.
영화 속에서처럼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종교의 이름으로(정작 종교에서는 그것을 명시하고 있지 않은데도), 문화의 이름으로, 할례 시술을 당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식의 전통은 부족 특유의 가족주의와 결합하여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가족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음 세대가 할례를 받도록 만든다.
그러나 케냐의 소녀들은 그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을 보인다. 할례를 당한 뒤 상처가 난 상태에서 낯선 할아버지에게 보내진 소녀는 탈출을 시도해 나이로비의 피신처로 오게 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 대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택한다.
또한 강제로 할례를 시키려는 부모를 피해 마라퀘트 학교로 도망 온 아이들은 부모들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대해, 견고한 가족주의에 대해 저항한다. 이들은 할례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위험한 지를 보고 들었으며, 그 경험과 기억을 증언한다. 이미 할례를 받았지만, 그것의 부당함을 알고 있는 언니들은 이들의 지지자가 되어 준다.


여성학대, 아프리카에 국한된 문제 아니다
우리는 여성할례에 대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바탕으로 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기 쉽다. 여성들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한 채 다른 사람(남성)을 의식해 자신의 몸을 변형시킨다. 목숨을 건 다이어트를 하거나, 성형수술을 하거나, 일명 ‘이쁜이 수술’이라 부르는 질성형수술을 하는 등으로 말이다.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는 전쟁 시에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적군의 여성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고, 아군의 여성은 ‘더럽혀지지 않게’, ‘타민족의 핏줄이 섞이지 않게’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된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여성할례를 행하면서 내세우는 말들의 논리는 결국 전쟁 상황에서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며, 그것은 또한 일상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이 문화 혹은 전통적 관례라는 명목 하에 용인되듯이, 그 행위자가 가족 혹은 애인이라는 이유로 문제시되지 않듯이, 전쟁 상황에서 여성과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폭력은 묻혀버리거나 ‘민족의 일’로만 치환된다. 이런 마당에 정작 ‘우리군’에 의한 강간, ‘우리 남편’에 의한 폭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할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해 그것을 ‘문화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아니면 무지해서 그런 것이니 ‘계몽’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할례의 근본적인 성격을 간과한 것이다.
할례 시행을 주장하는 이들은 클리토리스에 독이 있다, 더럽다는 등의 근거를 내세운다. 이런 말에 깔려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는 결국 ‘여성’ 자체에 대한 혐오다. ‘여성혐오’는 아프리카의 특정 부족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덜 배우거나’, ‘덜 선진화’되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여성혐오는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는 현상이다. 결혼한 첫날 밤 아내의 클리토리스를 보고 칼로 잘라 버리는 남편의 일화가 ‘교훈’처럼 떠도는 케냐에서나, “여자들은 몸을 함부로 굴리면 안 된다”는 연쇄살인범의 말이 회자되는 한국 사회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잊지 못할 그날>은 소녀들이, 강제 할례시술을 금지하는 법원의 명령서와 부모의 구속 판결을 받고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들의 움직임과 목소리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영향력을 갖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들 중 누군가는 언제, 어떤 식으로 할례를 받게 될지도 모르고, 할례는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상대로 싸웠다’는 낙인과 억압, 그리고 또 다른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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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강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