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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고공농성`에 되살아난 정은임 아나의 오프닝···

by eunic 2011. 7. 20.

'고공농성'에 되살아난 정은임 아나의 오프닝···
8년전 김주익열사 한진중 85호 크레인 농성 자살사건 때의 멘트 다시 회자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2011.06.13 13:45:38

배우이자 탤런트인 김여진씨를 비롯해 사회 각계 인사들의 동참을 불러온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이 곳은 노동계의 순교지 같은 곳이다. 8년 전 김주익 열사가 농성 129일 만에 목숨을 끊었고, 곽재규 조합원 등도 생을 마감한 장소이다. 또한 이들의 죽음에 떠오르는 한사람이 있다. 심야 라디오방송에서 이들의 죽음과 빗나간 ‘노동 귀족관’을 질타했던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이다.

고 정 아나운서는 이들의 죽음과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듬해(7년 전·2004년)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는 점에서 7년이 지난 지금의 한진중공업 사태와 묘한 ‘오버랩’이 되고 있다. 또한 이번 사태와 함께 다시 정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트가 인터넷상에 회자되고 있다. '외로운 싸움' '이른바 노동귀족이라는 노동자들의 삶'을 역설적으로 호소했던 그가 8년 만에 되살아난 것이다.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MBC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지난 주말(11~12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투쟁 지원을 위한 ‘시민응원단’ 버스를 함께 탔다는 한 블로거(dogku.egloos.com·트위터 닉네임 ‘delalocha’)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번 사태를 겪으며 정 아나운서의 생전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 멘트를 소개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8년 전이었다(2003년 10월 17일). 고 김주익 열사(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가 구조조정 반대·노동조합 활동 보장을 촉구하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 129일 만에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닷새 뒤인 그해 10월 22일 당시 MBC 라디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진행하던 고 정은임 아나운서는 당일 방송 오프닝에서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라며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라고 말했다.

그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라며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라고 방송했다.

이어 정 아나운서는 한달여 뒤(11월 18일) 다시 더욱 칼날같은 오프닝을 했다.

“19만3000원, 한 정치인에게는 한끼 식사조차 해결할 수 없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막걸리 한사발에 김치 한보시기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한 사람에게는 며칠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큰 돈입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에게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한 짐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휠리스(바퀴달린 운동화)를 사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씨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이 19만3000원이 마음에 걸려있었습니다. 19만3000원, 인라인 스케이트 세 켤레 값입니다.”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 ⓒMBC


그 아버지를 대신해 김주익씨의 자녀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준 이는 평범한 어머니와 노동자들이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휠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이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라며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에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아무 뜻도 없어요’(dogku.egloos.com)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는 13일 ‘정은임, 김주익, 김진숙, 85호 크레인’이라는 글을 올려 “트위터로 사람을 모으고, 35m 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투사가 트위터로 상황을 생중계하는 시대지만, 플랜카드는 80년대와 달라지지 않았다”며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에겐 세상도, 먹고 살기도, 80년대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그는 “하루종일 정은임을 생각했다”며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영화를 좋아했던 많은 동세대인들에게 정은임과 정성일(영화평론가)은 셋트로 묶여 나오는 아이콘”이라고 평했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 들어와서야 정은임 아나운서의 방송멘트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열렬한 팬이 됐음을 고백하고 정 아나운서의 방송재개와 그에 이은 비극(사고사)을 소개했다.

그는 지난 95년 진행하던 방송에서 하차했던 정 아나운서가 8년 만인 2003년 ‘영화음악’에 복귀하면서 시작한 이른바 오프닝의 주제가 ‘김주익 열사에 대한 추모’라는 점을 들었다. 이후 이듬해 봄까지 다시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는 이 블로거는 2004년 7월 정 아나운서의 교통사고사 소식에 “그 날, 나의 사춘기도 끝났다”고 회상했다.

그는 “8년전, 지상 35m 위 85호 크레인에 목을 맨 김주익 씨도 그 김주익씨를 눈물로 애도하던 아나운서 정은임도 모두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지금, 또 저 85호 크레인 위에 김진숙씨가 올라가서, 잘려나가는 동료들을 지키려 싸우고 있다”며 “인터넷이, 스마트폰이 나왔다고 해서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고 해서 세상이 변한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