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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악행을 부르는 생각없는 삶

by eunic 2005. 3. 2.

악행을 부르는 생각없는 삶

[한겨레 2004-03-19 18:06]


[한겨레]

왜 그렇게 살까 당신은 과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이나 충실히 하면서 편안히 살아가는 삶은 엄청난 악행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20세기의 위대한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가 1960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치하의 2인자인 힘러의 오른팔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유대인 학살의 임무를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던 사람이다.


당시 법정에 선 아이히만에게서 사람들이 보려 했던 것은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이요,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을 받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충격적인 아이히만의 모습에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이 아렌트로 하여금 〈정신의 삶1-사유〉를 쓰게 했다. 아이히만의 문제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도무지 생각을 하지 않는 ‘무사유’라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무사유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깃들 수 있는 악이다. 이를 아렌트는 ‘평범한 악’이라고 말한다.

생각 또는 사유는
자신과의 대화이며
바람처럼 다가와 고착된
사고와 관슴과 행위의 기준을
근본으로부터 흔들고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수구 기득권 세력이 집착하는
고착된 독단적 질서가
무사유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
사적이익에 몰두하는
집단행위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늘 판단을 내려야 한다

또 판단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행위를 통해 자신을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정치사상의 요체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검토가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 말이, “생각 없이 사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생각은 사물을 식별하는 인지작용이나, 문제를 푸는 계산능력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 기능이다.

생각 또는 사유는 “자신과의 대화”이며, “바람처럼 다가와 고착된 사고와 관습과 행위의 기준을 근본으로부터 흔들고 다시금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유는 모든 ‘독단’에 큰 위협이 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사유는 물려 내려온 권위와 관습의 힘을 근원적으로 반성하게 하며, 그 속에서 유지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가려내고 무가치한 것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사유에는 삶이 동반된다” “삶 가운데 발생하는 일들의 의미는 생각 속에서 언어로 제공”되며, “정의와 행복과 미덕은 사유를 근거로 수립”된다.

또한 아렌트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악을 저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악행을 하느니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행이 초래하는 내적 모순”을 견딜 수 없어 한다는 뜻이라고 아렌트는 설명한다.

그런데 생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냉소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사유는 우리를 궁극적인 허무와 냉소로 인도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처럼 지식인이 흔히 빠지는 냉소와 허무에 빠지지 않았다.

요즈음 우리의 탄핵 정국을 바라보면 아렌트의 말이 새록새록 새겨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렌트는 수구 기득권 세력이 집착하는 고착된 독단적 질서가 무사유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독단과 기존의 가치체계에 무비판적으로 몰입했던 사람들은 사유가 불러일으키는 생동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독단을 요구하기 쉽다고도 지적했다.

우리는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이 쉽게 독재에 협력했고, 또 독재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불합리한 전통의 수구적 집착에 쉽게 몰입하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수구와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의 근저에는 사유의 작용이 있다. “사유는 모든 독단을 위협한다.” 그런데 사유는 스스로 독단을 제시하지 않으며, 파괴된 독단의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렌트는 “생각한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어려움에 직면하는 매순간 새롭게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늘 새롭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

또 판단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의견을 부단히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 행위를 통해 자신을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정치사상의 요체이다. 서로 다른 계층, 직업, 성향의 사람들이 공유된 판단을 근거로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때, 정치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필수 조건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적 이익에 몰두하는 집단 행위는 정치가 아니다.

오히려, 솟구치는 비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 행위, 이를테면 세종로를 메운 사람들과 함께함을 통해 즐거움으로 변화됨을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의 힘이라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이런 공동 행위는 소통가능한 정치적 판단에 기초한 것이며, 바른 정치적 판단은 사유에 바탕을 둔다. 정치적 힘, 참된 정치권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어려운 아렌트의 문장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박수받을 만한 수고가 스민 아렌트의 〈정신의 삶 1-사유〉는 사유가 가진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책이다.


김선욱/숭실대 교수·철학 정신의 삶 1-사유
한나 아렌트 지음·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2만4000원 ⓒ 한겨레(
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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