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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0.75평 독방에서 실크로드학 피다

by eunic 2005. 3. 2.

0.75평 독방에서 실크로드학 피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펴냄·1만2000원


△ 왼쪽에서부터 문명교류사학자 정수일씨, 그가 옥중에서 일반 편지지에 단정하고 빼곡하게 쓴 편짓글, 4년여 동안 감옥에서 쓴 200자 원고지 2만5000장 분량의 초고 묶음.


파란만장. 문명교류사학자 정수일(70)씨의 인생역정을 요약하는 한 마디 말로 이보다 더 적확한 것도 없을 것이다. 북간도(연변) 두메산골에서 나라 잃은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사람, 서른 살에 북녘으로 ‘환국’한 뒤 15년을 평양 국제관계대학과 외국어대학의 동방학부 교수로 지내다 10년 남짓 튀니지와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온 사람, 12년 동안 ‘무함마드 깐수’라는 ‘필리핀 국적’의 ‘아랍계 외국인’으로 살다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붙들려 ‘죄수’가 된 사람, 2000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 노년을 학문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정수일이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그는 만 4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썼던 수많은 편지 가운데 90통을 추려 엮은 책이다. 한국에서 만나 뒤늦게 결혼한 아내에게 보낸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서간집에서 그는 아내조차 ‘깐수’인 줄로 알았던 자신의 살아온 삶을 정갈하고도 유려한 한국어 문장에 실어 이야기해준다. 그가 일생 동안 가슴에 품었던 뜻과 꿈을 하나하나 찬찬히 풀어놓는다. ‘간첩’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을 달고 사형을 구형받은 죄수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감옥살이 속에서 겪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털어놓는다.
편짓글 마디마디에 새겨진 그의 고통은 무엇보다도 학문의 길이 중도에서 막혀버렸다는 데서 온다. 동서문명교류학을 천착하고 아랍·이슬람학을 일구는 일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는데, “갇힌 몸이 되었으니 과연 나의 학문인생은 이로써 끝장난다는 말인가” 하고 한탄한다. 그러나 한탄도 잠시, 그는 감옥을 서재로 삼아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학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고 마음을 굳히고 ‘세상’에서 답파하지 못한 학문의 길을 감옥 안에서 찾는다.
0.75평 독방을 그는 ‘암자’로 생각하고 출가자가 고행수도를 하듯이 분초를 아껴가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비좁은 감옥 안에서 글을 쓰는 일은 극한의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다. 넉넉한 책상이 없어, 무릎 위에 큰 책을 펴놓고 그 위에서 글을 쓰다가, 용수통을 뒤집어 그것을 책상을 대신하는가 하면, 책을 여러 권 보자기로 싸서 임시 책상을 만들기도 한다.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 아픔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실크로드학’을 완성하려고 “시간을 혹사”한다.
그토록 학문에 매달리는 이유를 그는 ‘민족’과 ‘겨레’에 이바지하려는 데서 찾는다. 민족은 그에게 삶의 이유와도 같다. 그가 중국 최고의 엘리트로서 전도양양한 미래를 내쳐두고 ‘환국’을 결심한 것도 겨레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신념에 따른 것이었음을 그는 편짓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멀고 먼 길을 돌아 남녘에 온 것도 그 겨레의 분단을 자기 몸의 분단으로 느낀 결과였음을 이 편짓글들은 보여준다.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라는 좌우명은 그의 삶과 뜻을 오롯이 담고 있다.
감옥 안에서 네 번의 해가 바뀌는 동안 이 좌우명에 부끄럽지 않게, 200자 원고지 2만5000장 분량의 방대한 초고를 썼다. 프랑스어외에는 완역본이 없다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완역했고, ‘실크로드학’의 기반을 세웠다. 동양어 7개국어, 서양어 5개국어를 익히고도 부족해 산스크리트를 비롯한 고대언어를 새로 공부하면서 그는 학문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문명교류학의 새 길을 뚫은 것이다. 출옥 후 그는 자신의 옥중 연구를 다듬어 <실크로드학>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최초의 서역견문록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번역했으며 <고대문명교류사>를 비롯한 여러 권의 저서를 묶어냈다.
이 ‘민족적 두뇌’가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서재임을 그의 출옥 후 생활은 여실히 보여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중국의 국비 장학생 1호로 이집트에 유학한 청년 정수일씨(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집트 교육부 차관(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과 함께 1957년에 찍은 기념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