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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분단시대 지식인 정수일 교수

by eunic 2005. 3. 2.


“문명교류 길따라 인류상생 길찾길”
정수일 교슈의 문명교류기행


문명교류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정수일(70) 전 단국대 교수가 〈한겨레〉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

다음주부터 매주 화요일에 선보일 새 기획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이 그 마당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간 복역한 뒤 2000년 8·15 특사로 풀려난 정 교수가 신문 연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식의 사회 환원은 지식인의 마땅한 본분”이라고 말한 정 교수는 “인간의 앎과 삶을 소통해 주는 문명 교류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과 갈증을 해소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고 연재의 포부를 밝혔다.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은 이질문명 간의 교류 현장과 사례를 통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타자관(他者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문물교류, 인물의 왕래, 여행기, 탐험기 등 문명 교류의 다양한 형태와 방식이 다루어질 것이다.

교류를 통한 인류 문명의 발달이라는 큰 틀을 보여줌과 아울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진취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참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은둔의 나라’라는 가당찮은 누명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러려니 하고 안주해 왔죠. 이제 이 연재를 통해 그런 누명을 벗어던지고, 문명 교류에서 우리 겨레가 간직한 저력을 새삼스러이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연재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게 된다. 1부에서 주로 우리와 유관한 문명 교류사의 국면들을 다루고, 제2부에서는 시야를 넓혀 실크로드 등 교류 현장 답사를 통해 좀 더 현장감 넘치는 문명 교류 기행이 이어질 예정이다.

“실크로드 연구를 비롯한 문명 교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연구입니다. 현장과 유물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보충되는 현실에서 현장 탐구나 고증이 없는 연구는 탁상공론에 불과하게 되죠. 불행히도 저는 1996년 5월 ‘장보고 대사 해양경영사연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일본의 관련 현장을 탐방한 이후 아직까지 현장 취재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번 〈한겨레〉 연재를 계기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픈 게 학자로서 제 간절한 바람입니다.”

199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명 ‘깐수 사건’은 분단시대 지식인의 운명과 관련해 착잡하지만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1934년 중국 연변 출신으로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중국 외교부의 촉망받는 인재로 일하던 그는 조국의 북쪽으로 돌아가서 학자로서 활동하다가는 급기야 ‘공작원’의 신분으로 남파된다.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남쪽에 정착한 그는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 결과는 1992년에 낸 방대한 연구서 〈신라·서역 교류사〉로 한 결실을 보았다.


96년 구속 이후 5년에 걸친 옥살이에서도 그의 학자적 정열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는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말고는 온종일을 독방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보냈다. 교도소에서 파는 관제 편지지를 원고지 삼은 그의 글쓰기는 ‘메모 작업’으로 통용되었지만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분량과 내용에 이르는 것이었다.

감옥 안에서 그는 세계 4대 여행기 중의 하나인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문명 교류사의 첫 고전인 〈중국으로 가는 길〉을 완역했고, 〈씰크로드학〉의 집필을 마쳤으며 〈문명교류사사전〉을 70% 가량 진행했다. 200자 원고지로 쳐서 대략 2만5천장 분량. 2000년 출옥 이후 3년 반 만에 그는 〈고대문명교류사〉 〈이슬람 문명〉 〈문명교류사 연구〉 등 5권의 저서와 3권의 역주서, 총 8권의 책을 펴냈다. 모두가 묵직묵직한 책들이거니와, 특히 한 사람이 3가지 외국어로 된 책, 그것도 고전들을 역주한다는 것은 번역사에 드문 일이다. 지난 4월에 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역주서는 그 가장 최근 주자에 해당한다.


남북분단 회환 동서교류사 정열로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일종의 ‘10개년 집필 계획’을 세웠어요. 문명교류사 일반과 우리나라의 대외교류사를 번갈아 가면서 연구하고 책으로 써내려고 했습니다.

투옥되는 바람에 계획에 약간 변동이 생기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대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중세문명교류사〉 집필을 하고 있고, 이게 끝나면 〈고려·서역 교류사〉, 그 다음에는 〈근현대문명교류사〉, 그리고 근현대 우리나라 대외교류사까지를 쓰려고 합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본래 계획에는 없던 건데, 출판사와 함께 ‘문명기행 시리즈’를 기획하다가 기왕이면 우리의 것을 첫권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역주하게 되었습니다.”


감옥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집필에 쏟는 그의 초인적 공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새벽 4~5시까지(“남들 다 자는 새벽 시간이 글쓰기에는 좋다”고 그는 말했다) 하루 14, 5시간씩을 자료 조사와 집필에 할애한다.

오전에 일어나 뒷산에서 조깅과 체조(중국 기공 등을 응용해서 그가 나름대로 만든)를 하고, 하루 세 끼 밥 먹고 저녁 텔레비전 뉴스(와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말고는 그야말로 집필에 ‘올인’하는 셈이다.

이번 학기에는 한양대 대학원에 1주일에 세 시간 출강하고, 한달에 서너 번 외부 강연을 다니는 게 그의 단조로운 일상을 흔드는 변수들이다.


“그동안은 문명교류사와 이슬람 등에 관한 강연이 많았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후에는 혜초와 불교에 관한 강연 요청이 부쩍 늘었어요.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혜초는 우리 겨레의 첫 세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급 진서이고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입니다. 그 원전이 지금 프랑스의 한 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는데, 반환운동을 벌여 국보로 등재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올려야 합니다.”


문명 교류사의 큰 한 축이 이슬람문명이고 그가 〈이슬람 문명〉이라는 저서를 낸 바 있다는 이력을 감안해 이슬람과 중동사태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서구문명 중심주의에서 결과한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평화적 이념을 지닌 이슬람교를 ‘호전’과 ‘폭력’의 종교로 매도하다 보니 ‘한 손에는 꾸르안(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 양 인구에 회자되고 있어요. 또 나름의 역사성과 조건부를 띤 일부다처제를 비롯한 이슬람 사회 고유의 현상들이 부정적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거죠.”


중동사태의 핵심이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중동사태의 발단은 서방세력의 배후 조정 하에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의 심장부에 들어선 데서 비롯된 겁니다. 해법이라면 서로가 한 걸음씩, 가해자인 이스라엘이 더 큰 걸음으로 물러서서 공존을 모색하는 데 있겠죠. 이라크 침공과 포로 학대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어요. 목욕할 때도 벗은 몸을 남한테 안 보일 정도로 치부를 중요시하는 무슬림을 발가벗기고 조롱한 것은 패륜과 범죄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이전에, 합당한 명분도 없이 문명을 악용해 문명을 파괴하고 문명인을 도륙한 전쟁부터가 반문명적·반인륜적 범죄라고 해야겠죠.”


정 교수는 문명교류사에 대한 이해가 상생과 공영이라는 인류사적 화두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했다.


“상생과 공영은 보편 가치이고 인류 공동의 지향점입니다. 그런데 이 지향점을 향해 가는 첩경이 바로 문명 교류죠. 교류를 통해서만 인류는 서로 이해하고 상부상조하며 함께 번영할 수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미래 세계에 대한 이른바 ‘문명대안론’입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남북 가족얘기 묻자 애써 눈길 먼곳으로
정수일 교수의 인터뷰는 그가 출옥 이후 언론과 행한 사실상의 첫 번째 인터뷰였다. 지난달 역주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내놓고 합동 기자간담회에 임한 것이 언론과의 유일한 접촉이었다.
그는 매사에 신중한 편이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정 교수는 사전에 질문서를 보내 주기를 원했고, 대부분의 답변을 메모 형식으로 작성해서 건네 주었다.

비록 지난해에 복권되고 국적도 얻었지만, 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인 삶의 행로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때그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겨레가 요구하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일구어 왔다는 점, 그리고 분단의 현실에서 겨레와 아픔을 함께했다는 점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워낙 격변하는 시대에 기구한 인생을 살다 보니 기성세대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술회했다.
가족사에 관해 물었을 때, 정 교수는 “가장으로서 제 구실을 다하지 못했지요”라고 한마디 하고는 침묵했다. 그러나 애써 눈길을 먼 데로 돌리는 그의 얼굴에서 침묵 속의 외침을 읽기란 어렵지 않았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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